보금자리
또 한 번의 시 백석과 보낸 며칠간 (김왕노) 본문
불량한 날의 독법
나의 몰약을 나의 몰락이라
낙타에게를 나태에게로 읽는다
낙타의 길을 낙태에게로 읽는다
차가운 유빙이라고 적고
차가운 유방이라 읽는다
고비를 고삐리로 고삐로 읽는다
자갈을 재갈 잘 가 라로 읽는다
젓갈을 전갈로 저가로 읽는다
승기를 성기로 읽는다
감히 세상 앞에서 겁도 없이
지갑을 지랄이라고 읽는다
각하를 가가가가로 읽는다
그대의 화양연화를
그대 환향 년아로 읽는다
너를 나라고 나를 너라고 읽는다
불량한 날의 독법을
불량한 날의 도벽이라 읽는다
이 풍진 세상을 빤히 보면서
니기미 시펄이라 천천히 읽는다.
담쟁이 덩굴에게 배우는 사랑
난 담쟁이넝쿨에 사랑을 배우네
거침없이 사랑을 찾아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은 태양 곁으로
생장점의 분열과 분열로
그 무거운 사랑의 꿈을 천형처럼 매달고 끝없이 오르는 것을
수직 벽보다 더한 담을 능숙한 클라이머 같이 기어오르는 것을
그러나 담쟁이 사랑은 얼마나 멀기에 푸름으로 끝없이 타오르고
겨울 벽에 사랑한다는 문신을 철사 같은 넝쿨로 새겨 놓고
얼음장 쩡쩡 깨지는 소리 말 들려오는 겨울 초입을 기다리는가
그러므로 담쟁이넝쿨의 사랑을 더더욱 깊이 배울 수밖에 없고
그러니 사랑을 또한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져야 하는가
영원하여 쓸쓸한
바람과 내가 영원하지 않으면
이렇게 쓸쓸할 리가 없다
불어가다 불어가다가 갈대밭에 이르러 쓸쓸한 바람
죽음도 끝으로 할 수 없어 쓸쓸한 생들 영원함으로 쓸쓸한 별들
멸망이니 멸종 멸이리라 하여도
끝이 아니므로 가지는 쓸쓸함
아득한 곳으로 올라도 그게 끝이 아니고 시작이라 쓸쓸하다
영원한 것들이 가진 쓸쓸함의 분열과 분열, 그 또한 쓸쓸하다.
영원함으로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도 쓸쓸한 말이다.
영원함으로 누군가 영원히 그립다는 말도 쓸쓸한 말이다.
영원하다는 것은 매듭이 없다는 것, 시간의 열매가 없다는 것
영원이란 끝이 보이지 않음으로 쓸쓸한 것이다
영원함으로 가지는 쓸쓸함은 영원함으로 더 쓸쓸한 것이다
죽음도 끝이 아니므로 네가 쓸쓸하다
나 또한 영원히 쓸쓸할 것이다
아직도 아름다운 일몰이여
그때 일몰을 보고, 그 찬란한 마지막을 보고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 생을 배우기도 했네. 그 많은 교과서 행간을 지나면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배웠네. 누구나 가장 화려한 순간이 일몰이라는 것을, 인생의 화양 연하가 일몰인 것을 일몰이 너무 찬란해 입 다물지 못했지만 누구나 생애 어느 지점에서 찬란한
일몰 후 사라지는 것을, 그러니 일몰이여. 오늘의 일몰이더라도 한 번의
일몰이 아니기를, 일몰을 만들고 사라지는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르듯이 그러나 오늘 일몰이 단 한 번 일몰이라도 뜨겁게 가슴에 새겨진 불멸의 일몰이기를 네가 내게 일몰이고 내가 네게 일몰이더라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일몰이기를
하여 아직도 아름다운 일몰이여. 한 때 내 어두운 가슴을 밝히고 떠난
아직도 그대란 찬란한 일몰이여, 영원히 체념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일몰이여
그때 모든 것이 시였다
자다가 일어나 한 사발 자리끼를 마시고 다 잠들었다가
방광에 그리움이 차올라 일어났을 때 창밖에서 별빛이 온기를 실어 보내는 반짝이는 별들이 시였다.
사방에서 사납게 몰려드는 어둠
세상이 아니라 내게 절망하다 웅크린 절박한 밤
어둠을 갉아내는 쥐 소리가 희망을 부르는 시였다.
항구령이 내려 벙어리가 된 밤
거리를 휩쓰는 계엄군의 발소리 속에서 파닥이며
비바람을 견디는 어린 백양나무 이파리가 시였다.
뱃전을을 부술 듯이 달려왔다 부서지는 파도가
높을수록 더 높이 부르는 노래가 시였다. 가난한 가슴으로 가난한 서로를 나직이 불러주는 목소리가 시였고 가난한 가슴에 묻은
꺼지지 않는 불씨같은 가난한 이름이 시였다.
혼자 뜨겁게 피었다가 누가 보지 않아도 혼자 져가는 미지의 꽃이 시였다.
어둠의 숨통을 물어뜯으며
아아, 사라지는 별똥별도 시
쓸쓸한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도 한 방울 시
내 청춘이 걷어차여 도망가다가 고꾸라지며 불러 보던 어머니, 어머니도 시였다. 그때는
팔자 걸음
팔자 걸음 걷지 말라고 아내가 잔소리다. 조심 조심해 걷다 보면 어느새 또 걷는 팔자걸음
나는 팔자 걸음으로 팔자 발자국을 갯벌 같은 세상에
여기저기 찍으며 왔다.
내가 지금 팔자 발자국에 발 넣고 걸어 보던
달빛이 재미있다며
끝내 내집 뒤란까지 따라와 대숲과 노닥거리다 갔다.
팔자 걸음이 내 근본이라
팔자를 앞세우고 팔자 걸음으로 팔자 발자국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
어쩌다 말라 가는 무논에 푹푹 찍어 놓은 팔자 발자국에
미꾸라지가 살고 올챙이가 우글거리며 기우제를 올려
푸른 비가 오면 팔자가 편 듯 하늘을 향해 딱 벌어진 팔자 발자국이 아아 오오 노래해도 좋은 것
걷다 뒤돌아보면 팔자 센 나를 여기까지 따라오는 팔자 발자국, 내 팔자가 펴질 때까지 따라오려는 고집으로 꽝꽝 찍혀 있다.
푸른 지폐를 세며
드디어 나도 푸른 지폐를 센다. 몇 장 되지 않지만
밑천이 될 수 있으므로 이 돈으로 복권을 사면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으므로
이 돈으로 장미 한 다발을 들고 가면 짝사랑 그녀가 내 사랑을 받아 줄 수 있으므로 보아라.
나도 푸른 지폐를 센다. 만약 이 돈을 섣불리 쓴다면 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질 것이다. 돈 다발은 아니지만 푸른 지폐를 세다 어머니가 곁에 계시면 어머니에게 몇 장이 슬쩍 드리며 어머니 경로당 가셔서 아들이 준 용돈이라 자랑하며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돌리라 하고 싶은 아버지에게도 몇 장을 손에 꼭 쥐여 주며 막걸리 집에 가셔서 어른들 불러 시원하게 막걸리 한잔 하시라 권하고 싶어라.
내 손에 푸른 지폐가 있다. 몇 장 배추 이파리 같은 싱싱한 돈이 있다. 피 빨아 얻은 것이지만 이 푸른 지폐 횡재를 한 듯 기쁘다. 나도 지금 푸른 지폐를 세고 있다. 가난한 목숨값이 내 손에 쥐어져 있다. 침 발라 세 보는
근에게
근아, 나는 네 그림을 보고 있네.
그림 속에 네 고향 햇살이 쏟아지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녀야 할 사람들은 꽃 같은 얼굴이고
내가 그림 속에 들어가 살고 싶은 집들이 여기저기 있고
그림 속에 들어가 냄새 맡고 싶은 꽃은 소담스럽고
오늘은 태풍 북상으로 모두가 긴장하고 비설거지한다고 눈코뜰 새 없이 분주하나 태풍의 눈 안에 든 것 같은데 네 그림 속에 내가 잃어버린
내가 날마다 망명을 꿈꾸던 나라와 펄럭이는 깃발이 있네.
태풍의 어떤 기운도 비집고 들 틈이 없는 나라가 있네.
근아, 나는 네 그림을 보며 네 그림이 그림으로 끝나지 않고 현실을 멋있게 만들 청사진이라는 것을 아네.
유목민처럼 네가 홀로 화판 속으로 떠들며 때론 낙타처럼
고개 높이 들고 물 냄새를 맡으며 푸르릉댄 것도
때로는 화판 안에 폐허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어
푸른 와디를 기다렸다는 것도 네 붓 터치 터치마다 나타나
근아, 네 그림을 본 사람은 그림의 기억을 드라이브 삼아
그간 팽개쳐 둔 꿈을 제조립하고 느슨했던 것을 꼭꼭 조여
근아, 내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할 때
너는 눈부신 들판에 눈부신 한 묶음 풀꽃을 개울에 오르내리는
버들치의 반짝이는 비늘을 보여주는 순간 알았지.
네 뼈 마디마디를 붓을 세운 듯 세우고 영원히 마르지 않는 강물을 그리고 바다를 그리고
네 작업으로 끝내 아름다운 세상 하나 세울 거라는 것
근아,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쏟아지나 네 그림은 젖을 수도 없고 젖지도 않을 꿈 한 폭이네
센서 등
저 소녀 성능 좋은 센서등, 소년이 다가가자 환이 켜져 소녀의 웃음은 빛난다. 소년이 떠나면 곧 꺼질 것이다.
나도 꽃피는 봄이면 내 마음도 탁하고 켜져 오래 환했다.
옛날 어머니도 아버지가 센서등 아버지가 기술자로 울산공단에 오래 있다 돌아오는 발소리 동네 입구를 울리면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어머니는 탁 켜져 목련꽃보다 화사하게 빛이 났고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 각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가졌기에 사람이 나타나거나 사라지면 환히 켜지거나 깜깜하게 꺼지기도 해, 불야성의 도시라도 사람이 쉼 없이 자동으로 꺼졌다 켜졌다 하기에 아름다워
지금도 누가 다가가는지 멀리서 탁하고 켜진 환한 얼굴이 보여
갈치
제주도 앞바다가 내게 명검 한 상자를 보내 주었네.
제주도 앞바다로 담금질하고 무두질한 무엇이라도 단숨에 베어 버릴 명검 한 상자
이왕 이렇게 된 날
천군만마를 길러 명검을 들고 호령하며 북벌에 나서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학수고대했던 장수가 되고 싶은데
물이 가기 전 손질해 갈치구이나 조림을 하자는
아내의 말에 명검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네.
그래도 명검의 꿈을 일깨워 주려고 명검한 상자 보내 준 제주 앞바다가 내내 고맙네.
자작나무 숲에 흑임자 같은 별이 떠네
내 아지트인 언덕에 자작나무 숲에 흑임자 같은 별이 떠네.
먼 것은 더 멀어지게 만드는 밤의 습관 속으로 오래가지 못할 꽃이지만 혼심의 힘으로 피어나 들쥐처럼 어둠을 갉는 분주한 소리
나는 나를 점검하여 성능 좋은 안테나처럼 두 팔을 활짝 펴고
밤마다 먼 곳으로 텔레파시를 끝없이 보내며 이파리 파닥거리는
늙은 자작나무처럼 발뒤축을 들고 독사처럼 빳빳하게 고개 세우고
밤이 실어준 힘으로 먼 그대에게 날아갈 부메랑 하나 꿈꾸며
저 푸른 별 아래서 더 멀리 있는 길 하나를 더듬으며 가늠하네.
나의 부메랑이 어둠이 깊을수록 완강해지는 밤의 힘으로
강 건너 들판지나 산을 넘어 꿀벌 잉잉거렸던 아카시아 숲으로
어느 날 운석이 흘러가듯 가 그대 창에 아픈 별처럼 스쳐 오는
내 아지트에 상처입어 짐승처럼 웅크려 오래 상처를 핥을 때
같이 아파해 줬던 은하수와 별과 자작나무 숲에 기대 흔들리던 밤
어느 별에서 슬픈 사랑으로 온 울음이 밤 구름으로 몰려드는 밤
내 꿈에 아지트에서 기다리던 그대 발소리와 백년 사랑 재촉하며
울어 줄 백년 소쩍새 울음과 백년의 문장을 새겨 줄 구절초
마디마디 스미는 자작나무 이파리 잎맥을 읽는 바람소리
눈 붉게 울다가 뱀이 조용히 허물 벗는 소리
내 아지트인 언덕의 자작나무 숲에 흑임자 같은 별이 뜨면 별빛으로
깃털을 말리는 어린 새와 벌레와 풀잎과 밤이슬에 젖어 펄럭이는
십자지 같은 그리움과 밤의 감정과 밤의 로망과 밤에 페이지와 흑설탕과
내 아즈트인 언덕에 자작나무 숲에 흑임자 같은 영험한 별이 뜨면
우주의 초야이 듯 태몽이 한 치 한 치 깊어가는 내 처녀인 꿈
천한 명의 애인
애인에게 애인이 있습니다. 애인의 애인이 꽃일 수 있고 파랑새일 수 있습니다. 애인의 애인이 별일 수 있습니다. 애인과 애인의 애인과 내가 모여 강물같이 흘러갑니다. 저물녁이면 애인이 애인을 부르는 목소리 아련합니다. 하여 애인의 애인은 백 명일 수 있고 천 명의 애인일 수 있습니다. 갑자기 거리에서 마주친 소낙비가 애인일 수 있습니다. 벽에 기대어 늦은 휘파람을 불던 사내가 애인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애인의 세상, 봄은 애인의 봄이고 애인의 하늘 애인의 나라도 있습니다. 나는 애인이 애인을 사랑하면 나는 애인이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할 겁니다. 애인이 만인의 애인이라 해도 애인의 뜻이라면 이의가 없습니다. 애인이 천 명의 애인을 가졌다면 나는 애인을 포함한 천 한 명의 애인이 생기는 것입니다. 애인의 애인이 무기수이면 무기수가 나의 애인도 됩니다. 애인의 애인이 막다른 곳에 이르렀다면 나의 애인이 막다른 곳에 이른 것입니다. 애인 하나 가진다는 것이 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천명의 애인을 가진 애인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세상은 애인의 세상이라 나는 견딥니다. 내가 애인을 사랑하는 것이 애인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어디 클 수 있나요, 하여 나는 애인을 사랑하므로 애인마저 사랑합니다. 천한 명의 애인을 가졌습니다. 천한 명의 애인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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