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속도
실은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너무 짙어서 언제 걷힐지 모를 안개 때문에 밖에 나오기를 꺼려했다. 오늘은 5시에 눈을 떴는데 6시에 나가던 남편이 오늘 하루 가까운 데서 일하기로 했다고 하였으므로 좀 늦게 나가도 될 것 같다는 여유가 있어 보여 남편을 깨우지 않았다. 그런 것을 더 늦출 수 없다고 판단되어 깨워서 아침밥을 먹여 보내니 7시가 되었다.
아침밥을 먹여 보내야 된다는 사명감이 끝나면 그 이후 시간은 긴장이 풀리는지 잠깐 동안 공허에 젖어든다. 그만큼 아침 시간을 벌게 된데 대한 뿌듯함으로 일거리를 찾아 몰두할 수도 있는데 오늘은 새로 구한 영어책도 심드렁, 그림그리기도 의자에 앉기만 하면 허리가 아파 가물가물 잠이 오기 딱 십상이라 8시 반, 부득불 부진 부진 나선 곳이 바로 여기 백제보 못 미쳐 백마강 강변 둘레길이다. 어쩌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한숨 자거나 아니면 어영부영 보낼 수 있는 시간이고, 언제 걷힐지 모르는 짙은 안개로 움직이지 않아도 핑계는 충분했지만 토요일 오전, 그것도 10월 11일 이렇게 어영부영 보내기는 그렇고, 몸에 기운이 소진되었는지 뭘 잡기도 심상치 않고 하여 길을 나선 것인데 안개도 내 뜻을 알았는지 아니면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내 길을 비춰 주기 위함인지 강변에 초원은 드넓게 드러난다. 걸으라고 그 둘레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으니 들어서자마자 반갑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바로 이 길로 접어드는 백제보를 지나는 백제 큰 길에 벌써 한 30여 분째 자전거와 오토바이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10월 11일 토요일 오전 시간을 알아봤음인지 아니면 새벽부터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지만 이 시간쯤에는 태양이 그 안개를 적정선으로 거둬줄 줄 알았는지 싱싱 지나가는 자전거 행렬과 오토바이들이 이 강변에 기운을 북돋운다.
걷기와 자전거와 오토바이 속도에서 걷기가 제일 느릿하고, 자전거는 나름대로 적정 속도를 유지하여 가을의 기운을 실컷 맛볼 것이고, 오토바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만끽하는 속도가 있을 것이니 속도가 주는 활력이라는 것이 가을 들판 아래 유독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걷기를 하고 있으니 그들을 따라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가장 뒤쳐질 것이 분명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크게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는 이유는 비록 내가 이 강변 축구장 대여섯 개 합쳐 놓은듯한 넓이의 둘레길을 걷고 있고 거기에 그칠 것이나. 1시간 남짓 내가 미칠 수 있는 거리와 닿을 수 있는 발의 감촉과 스쳐가는 가을바람이 뺨에 닿는 감촉, 야생의 풀과 새들의 노랫 소리와 나풀거리는 나비. 자유롭게 지들끼리 들판에서 큰 거 작은 것 크게 다투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솟아 올라온 야생의 풀들을 일일이 만날 수 있을 것이니. 시간이 흐른만큼 여물어진 대로 또는 지금을 구가하는 모습을 하나씩 눈으로 훑어 볼 수 있을 것이니, 자세히 본다는 면에서 하나씩 음미하고 느낄 수 있다는 면에서 속도를 뽐내는 그들에게 크게 쳐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어 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참 드물게도 나는 결핍을 느끼지 않고 느린 속도를 유지하며 그들의 빠른 뒷모습을 끊임없이 일별하는 것이다.
세상에 걷는 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빠르게 굴러가는 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앞지르는 자, 그것도 모자라 바퀴 네 개로 쏜살같이 달아나는 자 다양한 부류의 속도들이 있다는 것이 또 한편으론 재미도 있다. 풀숲에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레들이 일일이 배를 밀거나 짧은 다리로 자신의 가는 길에 땅을 접촉하고 있는 그들이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내 속도는 또 얼마나 쏜살같아 보일까. 이즈음에 다양성이라는 것에 풍요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짙은 안개를 보고 두려움을 지니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전진하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할 풍광과 풍요로움이라 생각하니 그 또한 오늘도 내가 큰 선물을 받았다는 느낌이라 오늘도 어김없이 길을 나선 자 복을 받을지어다.
이렇게 뜻하지 않게 큰 선물을 오전 시간에 내가 또 틀어쥘 수 있게 된 것이 그저 가을은 선물이고 가을에 비치는 햇살과 강변과 그리고 가을 햇빛을 받는 모든 초목이 그리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이 모두 다 선물이다. 행복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인생이라고나 할까. 소유한 것 없어도 누리는 데서 느끼는 행복의 참 맛을 잠시 길을 나선 데서 느낀다.